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토 히로부미 (문단 편집) == 2차 시도 ==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조를 나누어 우덕순은 채가구역을,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매복했다. '''근데 기차는 채가구역을 그냥 통과하고 하얼빈역에 정차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 안중근이 이토를 [[FN M1900]]으로 3발 저격하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4발 저격했다. 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박혔고, 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박혔으며, 3탄은 갈비뼈 아래로 들어가 허리에 박혔다. 3발 다 급소를 맞혔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의 팔꿈치에 1발,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의 복부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의 왼쪽 무릎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나카무라의 오른쪽 장딴지에 1발을 맞혔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3920|네이버캐스트 '안중근']]과 원재훈의 '안중근, 하얼빈의 11일' 참조.) 하지만 민간인이 다칠 것을 우려하여 머뭇거리다가 체포당했다. 안중근은 체포당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까레야 우라!([[러시아어]]로 조선 만세) 까레야 우라!"'''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에서 안 의사의 저격을 받고 얼마 후 사망. 참고로 이토는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으며 동반했던 비서 모리의 안부를 묻고 눈을 감았다. 암살 당시 이토는 이때 일행들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기에 누가 이토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고한다. 오늘날과 같이 사진이 흔치 않았던데다 더욱이 원태우의 암살 미수사건 때문에 그 후 이토는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나도는 것을 극히 제한했다. 결국 안중근 의사는 저격대상인 이토가 코 옆에 [[점]]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만 들어 알고 있었을 뿐 얼굴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얼빈역으로 가게 되었다. 다만 . 결국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수 없었다. 이에 안중근 의사는 체념했으나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 주는 덕분에''' 안중근 의사가 그 자의 얼굴을 보고 점 등을 확인하여 본인임을 알아보고 저격을 할 수 있었던 것. 정말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안중근과 같이 거사를 담당했던 유동하 의사의 친척의 증언.) 일본 [[야마구치]]현 [[히카리(도시)|히카리]]시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다.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다. [[KBS]] [[역사스페셜]]에서 박물관을 찾아가 이토가 입었던 내복을 촬영했다. 그 외의 내용은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82514.html|# 이 기사]] 참조. 유언, 제2 암살설 외 다른 이야기도 분쇄한 기사이다. 일각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방까지 생각하지 않았지만 암살로 인해 한일합방이 빨리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역사의 아이러니" 란 논지로 서술된바 있다. 하지만 저자인 [[이원복]] 교수의 역사관에 대한 비난이 이어지자 재판본에서는 "한일합방을 시급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반드시 한반도를 일제의 아래에 넣으리라 생각했다" 라는 내용으로 수정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과는 별개로 '''이토의 자택에서''' 가쓰라 총리가 질문했던 1909년 4월의 회동에서 조선병합은 사실상 결정되었다. 그러나 합병이 결정된 후에도 이토 히로부미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조선왕실 폐지론에 대해 반대하고, 조선 왕실의 보존과 각 도에서 60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등의 시안을 작성하고 있으며, 이토 히로부미 스스로도 말했듯이, 뷔르템베르크 공국과 같이 일정 자치를 허용하려고 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러나 자치론자들이 오늘날 [[매국노]] 취급당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것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조선인을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일본인과 동일하게 대우하자는 식의 주장이 일본에서 맥이 끊긴 것도 아니다. 심지어 후대에 네임드 극우로 취급받는 [[기타 잇키]] 역시 이런 주장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한국의 식민지화 연도를 1905년으로 산정할 경우, 이런 변호의 여지는 사라지고 이토는 빼도박도 못하는 식민지화의 원흉이 된다. 여하간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통감이란 직책은 그의 정치 행보에선 동양의 세력구도를 결정짓는 요직이었고, 사망 시점에서 이토는 통감 자리도 내놓고 추밀원 의장이 된 상태였다. 이에 대해서 다른 시각도 있다. 사실상 한일합방을 확정짓기 위한 일들은 대부분 이토가 했고, [[메이지|메이지 덴노]]가 그리 반대했는데도 끝내 그를 설득시켜 [[다이쇼|황태자 요시히토]]의 방한을 추진한 것도 조선통감을 맡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였으며, 통감 자리를 내놓은 후 그는 다시 추밀원 의장 직을 맡았다. 이런 것 보면 그가 정치권에서 아예 밀려나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즉 오히려 이토가 조선의 뒷처리에 집중하기 위해 잠시 총리직 등 국내 요직을 일부러 떠나있었다는 것이다. 김삼웅 교수는 안중근 평전에서 안 의사가 이토를 '''암살'''한 것이 아니라고 썼다. 위에 나온 제2 범인설 따위의 얘기가 아니라, 비겁한 암살이 아닌 정정당당한 처단이라는 뜻이다. 이는 당시 시간이나 주변에 있던 사람 등을 통해 짐작 가능하다. 취재진도 꽤 있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측에 본인은 독립군 중장의 신분이니 전쟁포로로 취급해달라고 했지만, 굳이 암살당한 이토가 악랄한 일제의 고관이 아니었더라도 이 경우 국제협약상 교전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다. 교전권자임을 상징하는 의상, 즉 독립군복 등을 입고 총을 쏜 것이 아니라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이토를 사살했기 때문. 하지만 그렇다고 일본이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이미 행정부의 명령으로 안중근을 사형시키기로 정해놓고서 안중근의 의견을 모두 묵살한 채 사형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안중근이 전쟁포로든 아니든 이미 일본 법정은 많은 국제법을 어겼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한 권총은 벨기에제 FN M1900 이고 .32 ACP 라는 엄청 작은 권총탄을 사용한 호신용 권총이었다. 흔히 죽을 때 남긴 유언이 "당했다" 라거나 자신을 저격한 자가 조선인이란 말을 듣고 중얼거렸다는 "멍청한 놈" 등이라고 알려져있지만 전부 거짓말로 밝혀졌기에 의미는 없다. 한국에서는 현재까지도 "안중근 의사가 국제정세에 밝았더라면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였을까, 한국이 한일합방을 당한 건 안중근이 이토를 죽여서이다." 하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 조선 병합 부분만 놓고 따지면 분명 이토가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이 나오는데에는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다. 실제로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 강경파(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무단통치하자는 세력)이 날뛰는 것을 어느 정도 제어하고 조선을 온건하게 대하려고 했던 세력의 대표자가 이토였기 때문. 실제로 이토가 사살됨으로서 제국주의 강경파와 군부가 폭주하며 식민지화된 조선이 특히 더 강하게 억압, 탄압받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은 맞다. 다만 당시 일본 정계 내부자가 아닌 외부인은 이런 것을 잘 파악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구글에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멍청한 놈>을 키워드로 쳐서 검색하면 2010년 까지만 해도 수도 없이 이런 얘기를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토 생전에 합방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며 이토도 생각을 안했을 뿐, 반대하지는 않았다. 이토의 죽음을 고종과 순종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순종실록>을 보면 "이토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총리대신 이완용을 정부대표로 이토태사(太師)를 위문하게 하고, 메이지 천황에게 조전을 보내는 한편,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황태자에게 이토태사의 죽음에 대해 석달 동안 상복을 입도록 했다.(10월 29일)"는 등의 내용이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또한 일본측 자료[* 당시 통감부 와카바야시 라이조(若林賚藏) 경시총감이 소네 통감에게 올린 10월 29일자 보고서 '이토 공 조난에 관한 궁중의 모양(二)' (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 문서> 7권, 26~28쪽) ]에 의하면, 고종은 이토를 '한국의 자부(慈父)'라고 언급했으며 '그 [[안중근|흉한]]'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뿐이라며 크게 개탄한 것으로 되어있다. 가히 충격적인 발언이다. 고종은 일반 민중들이 이토의 죽음을 기뻐한것과는 대조적으로 이토의 유해가 하얼빈에서 다롄으로 옮겨지자 측근인 조민희(趙民熙)를 보내 위문하고, 11월 4일 이토의 국장일에는 서울의 통감부를 직접 찾아가 조문까지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고종은 이토의 죽음을 슬퍼했던것으로 볼 수 있다. [* 실제로 이토는 조선 황족에게 호의적이었다고 하며, 일본내의 대 조선 강경파를 제어하는 인물이라 나름 괜찮게 생각하였을 수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